1995년 7월5일 서울 서초구 서초동 1685-3번지. 이곳에서 백화점이 붕괴한 지 이레째가 됐다. 소방본부 인명구조반은 지상 5층부터 지하 4층까지 내려앉은 철근 콘크리트 더미를 수십톤씩 걷어내며 생존자 수색 작업을 하고 있었다. 붕괴 이후 닷새째까지는 생존 신호가 종종 포착돼 구조되는 사람들이 있었다. 엿새째부터 그런 신호가 뚝 끊겼다. 구조반원들이 잔해 더미 속에서 작은 공간을 발견할 때마다 전등을 비추며 “사람이 있으면 대답하세요”라고 외쳤지만, 응답이 없었다.
현장은 화재로 인한 열기와 유독가스가 가득했다. 분진과 석면가루도 호흡이 곤란할 정도로 날렸다. 압사해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시신들이 부패하면서 나오는 악취도 숨을 틀어막았다. 구조반원들은 악취를 이기기 위해 독한 냄새가 나는 소독약을 코 밑에 발랐다. 소독약은 악취를 이기지 못했다.
몇시쯤 되었을까. 잔해 더미 아래에서 희미하지만 분명하게, “아저씨 살려주세요”라는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17년차 소방관인 도봉소방서 구조대장 경광숙 소방위의 귀가 쫑긋 섰다. “어디세요?”라고 물으니 “여기 아래에서 연기가 계속 올라와요”라고 했다. 지하 주차장에 있던 차량 화재로 인해 불타오른 연기가 올라와 생존자가 버티고 있는 잔해 더미 틈새를 거쳐가고 있었던 것이다. 경광숙이 “저녁에 가족 품으로 돌아가셔야지요. 제가 묻는 말 빼고는 말하는 거랑 숨쉬는 거 최소화하고 견디셔야 합니다”라고 하자 “너무너무 힘들어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경광숙은 생존자가 묻혀 있는 방향 확인을 위해 “제가 제 자리에서 돌면서 시계 방향으로 12시, 3시, 6시를 부를테니 제일 가까이 들리는 숫자가 몇시인지 확인해주세요”라고 요청했고, 잠시 뒤 “3시”라는 답이 돌아왔다.
3시 방향에 있는 잔해 더미를, 70~80명의 구조반원들이 파고들어갔다. 한참을 파다가 경광숙은 한 번 더 생존 확인을 했다. 그런데 여성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온 곳은 3시 방향이 아니었다. 붕괴된 구조물과 공간들 사이에서 소리가 굴절된 것이었다. 구조반원들은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옮겨 건물 잔해를 치웠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경광숙이 다시 한 번 “괜찮으신가요?”라고 물었는데,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한 시간쯤 뒤, 그 자리에서 세 구의 여성 시신이 발견됐다. 한 구는 이미 부패가 시작됐고, 다른 한 구는 사망한 지 한참이 지나보였지만,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마지막 한 구는 막 숨진 것으로 보였다. 백화점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목소리를 들을 정도였는데, 조금 더 빨리 구조했더라면….” 경광숙은 죄책감에 시신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했다.
5년차 소방관인 경기도소방본부 항공대 소속 소방교 장남일은 붕괴 1시간쯤 뒤인 6월29일 오후 7시께 소방헬기를 타고 하늘에서 현장을 처음 목격했다. 삼풍백화점 에이(A)동은 은 한쪽 벽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다. “지상의 상황을 모두 알 수는 없었지만, 정말 처참했습니다.”
현장은 통제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체계적으로 수색하지 못하는 정부에 반발한 유가족들은 직접 증거를 남기겠다며 구조 과정을 카메라로 촬영하거나 망원경으로 지켜봤다. 자원봉사를 핑계로 백화점 물건을 절도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장남일은 그런 와중에 부상자 4명을 헬기로 병원에 이송했다. 2명은 치명상이었다.
4년차 소방관인 인천소방서 구조대원 박태선 소방교도 참사 이튿날부터 현장에 투입됐다. 붕괴 현장은 지옥이었다. 콘크리트 철근들이 언제 머리 위를 덮칠지 모르는 현장을 헤집고 다니는데, 살과 근육이 썩어 뭉개졌거나 퉁퉁 부어 있는 시신들이 발견됐다. 철근에 눌린 시신을 용접기로 잘라내며 수습했다. 2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진처럼 선명하게 박힌 한 장면이 있다. 포클레인이 현장을 파내다가 형체 없는 시신을 끌어올린 것이다. “속옷만 입은 시신이었는데, 결국 일부는 찾지 못했지요.”
구조대원들에겐 숙소도 제공되지 않았다. 잠원소방파출소 마당에 합판을 깔고 70명씩 모여서 자는데, 대원들의 옷과 몸에 묻은 썩은내가 진동했다. 무엇보다 계속 죽어가는 사람들을 봐야 했던 압도적 재난의 규모에 짓눌려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부패된 시신들을 만지다가 왔으니 잠을 이룰 수가 없었어요. 현장에 특전사 선후배들이 많이 와 있었는데, 함께 근처 포장마차에 가서 소주라도 한 잔 마셔야 잠시라도 눈을 붙일 수 있었죠.”
29일 구조 기간 동안 현장에 투입된 구조 인력은 연인원 6만8천여명이었다. 소방관들 다수는 피부염을 앓았다. 화재 진압을 위해 소방용수를 계속 뿌려야 했는데, 이 물이 시신에서 흘러나온 진물, 붕괴 현장의 오염물과 섞여서 고인 채 오염됐다. 소방관들이 시신을 수습하려면 이 물 속에 들어가야 했다. 며칠 동안 철근 콘크리트에 이리저리 긁히며 몸에 상처가 난 상태에서 오염된 물과 접촉하니 쉽게 감염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가려움증 정도라고 생각했지만, 상태가 심각해진 대원들은 이후 한동안 현장 활동을 하지 못할 정도의 병증을 호소했다. 소방관의 사명감에 모든 걸 맡긴 국가가 정작 이들의 보호는 외면하던 시절이었다.
세 명의 기억이 교차하는 그날 이후, 경광숙(66)은 19년, 박태선(60)은 28년, 장남일(61)은 26년 동안 소방관 생활을 더 했다. 경광숙은 2014년 소방령으로, 박태선은 지난 6월 소방정으로, 장남일은 2021년 소방경으로 은퇴했다. 이들은 삼풍백화점 이후에도 수많은 화재와 재난 현장을 오가며 몸에는 각종 부상과 질병을, 마음에는 트라우마를 쌓아갔다.
난청
경광숙과 박태선에게 끈질기게 고통을 안긴 질환은 소음성 난청이다. 소방관들은 소방차와 구급차에 달린 날카로운 사이렌 소리를 일상처럼 듣고 산다. 소방관 출신인 오영환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제출받은 전국 소방공무원 특수건강검진 자료를 보면, 난청을 겪는 소방관은 2020년 7608명, 2021년 7702명, 지난해 8931명으로 꾸준히 늘고 있다. 소방관들의 공상 신청을 대리하는 법무법인 감천도 올해 초부터 소방공무원들로부터 들어온 공무상 재해 신청 관련 상담 건수 가운데 40%가 소음성 난청 질환이었다고 밝혔다.
실제 지난 7월21일 한겨레가 경기 가평소방서에서 소방차에 달린 사이렌 소리의 소음 수준을 직접 측정해 본 결과, 사이렌의 최대 음량은 115.7㏈(데시벨)에 달했다. 소방펌프차와 사다리차의 전자 사이렌을 울린 상태에서 차량 바로 앞 범퍼에 소음측정기를 두고 측정한 결과다. 보호장치 없이 100㏈에서 15분 이상, 110㏈ 이상에서 1분 이상 반복적으로 노출되면 청력 손실 위험이 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110㏈ 이상의 소음 노출은 주당 2분30초 내로 제한해야 안전하다고 권고한다. 출동이 잦은 소방관들에게는 준수가 불가능한 권고다. 소방관들에게 귀마개 등 청력보호장비를 지급하고, 소방차 내에 방음 시설을 갖춰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주한 미 공군 오산기지 선임소방검열관인 소방 전문가 이건씨는 “각 소방서가 보건안전담당관을 중심으로 귀마개 지급 실태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문제는 대부분의 소방관들이 난청 질환을 그냥 삭이고 만다는 점이다. “사이렌 소리를 늘 듣다보니 주위에도 난청을 겪는 동료들이 굉장히 많아요. 하지만 으레 익숙한 상황이고 안해줄 것 같기도 해서 굳이 공상 신청을 하지 않았지요.” 경광숙의 말이다.
경광숙과 달리 박태선은 최근 난청 공상 승인을 받았다. 구조대에서 오래 근무한 박태선은 사이렌 소리에 더해 다른 소음에도 자주 노출된 특이한 경우다. 소방항공대에서 경비행기 조종 업무를 하고 헬기를 탔다. 수난구조훈련에서 깊은 물에 하루 종일 잠수하는 업무도 더해지면서 고막이 혹사당했다. “구조용 헬기는 기체 진동과 소음이 굉장히 심하지만 방음이 안 되죠. 옛날 구조대 차량도 귀가 아플 정도로 따가운 사이렌 소리가 났어요. 이명이 생긴 건 15년 가까이 됐죠. 이제 보청기를 해야할 것 같아요.”
그러나 박태선도 끝내 공상 신청을 하지 못한 질병이 있다. 구조대원이라면 누구나 달고 사는 근골격계 질환이나 화상이다. 박태선은 엘리베이터가 없는 빌라와 쪽방촌에서 구조자들을 들것에 싣고 나오다 허리를 다치고, 고공낙하를 하다가 로프에 손바닥 살이 떨어져 나가는 화상을 입거나 다리를 접질려 퉁퉁 부은 상황에서도 그대로 출근했다. 구조대 생활 초기 7층에서 추락해 3일 동안 의식 불명에 빠졌던 경광숙도 오랜 후유증에 시달린다. 눈 양쪽의 시력이 현저하게 차이가 나는 경광숙은, 이를 맞추기 위한 안경을 쓰면 어지럼증이 재발해 구토 증세가 나타난다. “예전에는 공상이라는 개념이 없었으니까요. 다 자비로 침 맞고 하면서 버텼어요. 발을 다쳐서 병원에서 깁스를 하고 있는데 ‘왜 안 나오냐’는 전화를 받고 목발 짚고 사무실에 나오기도 했으니까요.” 박태선이 말했다.
늙은 소방관들은 오랜 기간 축적된 병증을 입증할 방법도 없다. 이들이 젊은 시절 다녔던 병원 기록들은 이미 폐기됐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누적돼서 몸이 아파도 입증이 안 되는 거죠. 배들 중에는 퇴직하고 귀나 근골격계에 문제가 생겨도 인정 못 받는 분들이 많아요. 병원 서류도 10년 이내 폐기되고, ‘네가 나이 들어서 아픈 거 아니냐’고 하면 입증하기가 힘들죠.” 박태선의 말이다.
트라우마
트라우마도 소방관들을 괴롭히는 마음의 병이다. 경광숙은 삼풍백화점에서 구조하지 못한 그 여성의 “아저씨 살려주세요”라는 목소리가 이후에도 내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애써 얼굴을 보지 않았던 그 여성의 실루엣이 보인다거나 꿈속에서 다가와 살려달라고 손을 잡는 상황이 이어졌다. “구조대원을 하면서 제 손을 잡고 돌아가신 분도 계셨어요. 그런 죽음을 수없이 봤기에 저 목소리도 곧 잊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하지만 단순히 목소리를 들었을 뿐인데도 고통이 너무 커요.”
경광숙은 정신과에서 약물 치료를 했다. 그럼에도 죄책감이 사라지지 않아 극단적인 생각을 한 적도 두 번이나 있다. 사건사고 뉴스를 보지 않고 신경안정제와 수면제 복용양을 조절하며 마음 상태를 살폈다. “그 후에도 5~6년 동안 계속 따라 다녔어요. 다른 사건들까지 겹쳐서 20년 정도 정신과 치료를 받았지요.”
지난달 1일 경광숙은 서초구 양재동 매헌 시민의 숲에 있는 삼풍백화점 참사 위령비를 찾았다. 그는 평소에도 이 위령비를 자주 찾는다. 희생자 502명의 이름이 기록된 위령비를 한 바퀴 돈 경광숙은 어느덧 흐르는 눈물을 닦아냈다.
“정신적인 고통이 심해지니까 그냥 잊어버리려고 노력을 많이 했어요. 누구에게 힘들다고 호소하면 ‘소방관이 의지력이 없다’, ‘나약하다’고 하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서요.” 경광숙의 고통은 그날 이후 28년이 지난 오늘도 현재진행형이다.